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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모음/일상 속 단상

목욕탕 단상

by 코장군 2019. 8. 6.


부산에 갈 때 마다 부친과 목욕탕에 즐겨 가는 편이다. 주로 동네 목욕탕에 가는데 갈 때마다 자주 마주치는 장면이 있다.

수박 한덩이를 붙여 놓은 듯한 큰 배를 가진 아저씨들. 쉽게 일반화 할 순 없지만 주로 나이가 드신, 딱 내 아버지 연배의 60대 들이다. 신체가 전체적으로 큰 게 아니라 배만 유독 튀어나온, 소위 ‘복부 비만’아저씨들이다.

내 아버지도 예외가 아니다. 오랜 직장생활이 남긴 훈장처럼 60 넘는 나이에도 큰 배를 가지고 있다. 이런 수박형 복부 비만 아저씨들에게 일일이 다 물어보진 못하지만, 내 아버지의 삶으로 유추해 볼 때 그 큰 배의 연유는 아마 잦은 음주와 잘못된 식습관 탓일 게다.

하루는 목욕탕에 앉아 또 다른 복부 비만 아저씨를 보며 우리집 고양이 ‘달이’가 생각났다. 아내가 학생 시절 길에서 주워온 길고양이 달이. 주워 왔을땐 앙증맞은 사이즈의 고양이 였다. 허나 양질의 사료를 먹고 지내며 몸무게가 폭발적으로 늘었다. 한 때 10키로도 훌쩍 넘기며 고양이 특유의 날렵함도 무뎌져 버린 녀석은 보는 사람마다 걱정을 할 정도 였다. 아내의 노력으로 몸무게 조절은 성공했지만 왕년(?)의 몸무게를 과시하듯 아직도 뱃가죽은 아래로 추욱 쳐져있다.

이 녀석의 정확한 나이를 알 수는 없다. 대략 1년여 정도는 길고양이였다고 추정된다. 아직 길고양이의 습성이 남아 있는데 바로 식사 때다. 누가 재촉하지도, 뺏어 먹지도 않는데 사료만 주면 뭐가 그리 급한지 꿀떡꿀떡 삼켜버리기 일쑤다. 좀 우아하고 여유있게 씹어 먹으면 건강에도 좋고 얼마나 좋은가. 옆에서 그렇게 잔소리(?)를 해도 그 버릇을 고치지 못해 허겁지겁 먹고서는 이내 사료 덩어리를 토해 버린 적이 한 두번이 아니다.

내 아버지는 1952년 1월에 태어났다. 내 아버지의 어린 시절을 본 적은 없지만, 기본적인 역사 소양이 있다면 그 시절 전국민이 찢어지게 가난했었다는 건 추측할 수 있다. 이미 태어났을 때부터 나라가 전쟁 중이었다. 부산도 전국에서 내려온 피란민들도 엉망이 되었을 터이고, 판자집들 천지에 사람들이 꿀꿀이죽을 먹었다고 전해지는 힘든 시절이었다. 전국민이 평등하게 심하게 못 살던 시절.

전쟁은 53년 7월에 멈췄다. 그 후에 할아버지 세대, 아버지 세대는 얼마나 열악한 환경에서 생존해 왔을까. 80년대생인 내가 언급하기 조심스럽지만 좀 심하게 말하면 지금 길고양이들보다 더 삶이 열악했을 수도 있다.​ 아직도 음식 남기는 거 보면 꼭 다 먹으라 잔소리 하시고, 배 불러도 왠만해선 밥 남기지 않는 아버지 세대들. 이 본능은 어린 시절부터 몸에 배인 습관일지도 모른다. 달이가 안전한 집에서도 밥을 급하게 먹듯이 말이다.

그래서 식습관을 구실삼아 아버지에게 잔소리를 할 때마다 사실 뜨끔하다.

“아빠, 밥 그거 탄수화물 덩어리에요. 끝까지 안 드셔도 되요”

이 따위 소리를 내가 할 수 있는 것도.
다 아버지 세대가 그 찢어지게 가난했던 시절을 잘 극복해 준 덕분인데 말이다.

우리 80년대생들이 잘나서 태어나자 마자 풍요로웠던 게 아닌 것처럼, 50년대생들이 원해서 찢어지게 가난했던 건 아니었을 게다. 아버지 세대들의 어려웠던 유년시절과 풍요로워진 이시절을 넓게 펼쳐보면 목욕탕에서 보이는 아저씨들의 복부비만도 이해가 간다. 아니 고맙다.

​아버지를 포함한 50년대생 아저씨들 모두건강하게 노후생활 하시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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