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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모음/할아버지의 삶

내 할아버지의 독립운동사 (대구사범학교 학생항일운동)

by 코장군 2021. 2. 21.

일요일 오후, 우연히 가게 된 강북의 브런치 까페. 

아내와 딸과 도란도란 시간을 보내고 나오니, 공교롭게 까페 바로 앞이 4.19 묘지이었다. 

서울 생활이 17년 째지만, 419묘역은 처음 와 보는 거였다. 

 

배도 부르고 잠시 산책이라도 할 생각에 들어간 그 곳 입구에서 나는 한 포스터 한장을 발견했다. 

2021년 2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바로 대구사범학교 독립운동 내용이 실린 포스터 내용과 그 아래 독립운동가 들 세분의 사진

 

2021년 2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 권쾌복, 배학보, 유흥수 선생

blog.naver.com/mpvalove/222224128361

 

2021년 2월의 독립운동가 - 권쾌복, 배학보, 유흥수 선생

국가보훈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권쾌복(1921~2009),배학보(1920~1992),유흥수(1921~2016)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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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의 인생 한 장면이 이제 독립운동사(史)가 되어 가는 것만 같았다.

2018년 4월, 우리 가족 곁을 떠나신 나의 할아버지. 이주호 선생님 (1921~2018)

할아버지는 대구사범학교 항일독립운동에 참여했던 독립운동가 중 오래 생존했던 분이다. 

 

그리고 포스터 속 세 분 중에 가장 오른쪽에 계신 유흥수(1921~2016) 할아버지. 

이 분은 할아버지와 같은 해 태어나셨고, 같은 심상과 9기 입학 동기생으로 함께 독립 운동을 하셨고, 

광복 후에도 마지막까지 막역한 친구로 지내셨다. 

사료에 따르면, 할아버지에게 독립운동을 권유한 것도 유흥수 할아버지였다. 

대구사범학교 학생들은 날로 강화되는 학교 당국과 일제 관헌의 감시와 통제 속에서도 항일운동을 준비해 나갔다. 1940년 11월 23일 이태길의 하숙방에서 유흥수 선생은 독서 모임의 활동을 주도하던 박효준, 이태길, 강두안, 박찬웅(朴贊雄), 동기생인 문홍의(文洪義), 이동우(李東雨) 등과 전쟁 상황을 포함한 시국에 관한 의견을 나누었다. 학생들은 세계정세를 볼 때 곧 일제가 패망하므로 다가올 독립을 위해 보다 조직적인 활동이 필요하다는 인식에 일치하였다. 박효준이 민족의식을 앙양하고 실력을 양성하며, 독립운동을 벌여 일제 식민지로부터 벗어나 독립할 것을 목표로 하는 비밀결사의 결성을 제의하였다. 유흥수 선생을 포함한 참석한 학생들이 그 제안에 모두 동의하였다.

유흥수 선생과 학생들은 학교 당국의 눈을 피하기 위해 문예 활동을 표방한다는 의미로 비밀결사의 이름을 ‘문예부(文藝部)’라고 결정하였다. 박효준이 조직을 실질적으로 주도했으며, 별도의 조직 체계를 두지 않았다. 다만 운동방침으로써 1)부원은 비밀을 엄수할 것, 2)부원은 매주 토요일 각자가 쓴 작품을 가지고 참석하여 각기 이것을 감상 비평하고 서로 의견 교환할 것을 결정하였다.

유흥수 선생은 같은 입학 동기인 9기생을 중심으로 동지 규합에 나섰다. 1940년 11월 하순부터 문홍의와 함께 조강제(趙崗濟), 박호준(朴祜雋), 이주호(李柱鎬)를 차례로 만나 문예부의 결성 목적을 설명한 후 가입을 권유하였다. 세 학생은 비밀결사의 결성 취지에 동의하고 가입하였다. 1941년 1월 하순까지 문예부 부원은 10명에 이르렀다.

(출처:국가보훈처 공훈전자자료관) 

 

또한 비밀결사 ‘다혁당(茶革黨)’을 만들때도 같은 하숙집에서 동지들을 함께 규합했다. 

1941년 2월 15일 저녁에 유흥수와 이주호 선생의 하숙집에 유흥수, 권쾌복, 배학보, 이주호, 조강제, 이홍빈, 문홍의, 박호준, 이동우, 이도혁, 문덕길, 서진구, 최영백(崔榮百), 김성권(金聖權), 최태석(崔泰碩), 이종악(李鍾岳), 이홍빈(李洪彬), 김효식(金孝植) 17명이 모였다. 문홍의가 조선인의 자각으로 일치단결하여 민족의식을 앙양하고, 문예·예술·운동 분야의 실력을 양성하여 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비밀결사의 조직을 제안하였다. 학생들이 모두 동의하여 비밀결사를 결성하였다.

 (출처:국가보훈처 공훈전자자료관) 

e-gonghun.mpva.go.kr/user/IndepCrusaderDetail.do?goTocode=20003

 

공훈전자사료관

공훈전자사료관 이달의 독립운동가 콘텐츠 심볼 배학보 / 권쾌복 / 유흥수 배학보 裵鶴甫 ,1920.08.19~미상. 경상북도 성주 , 애국장 1991 권쾌복 權快福 ,1921.02.02~2009.12.19. 경상북도 칠곡 , 독립장 1963

e-gonghun.mpva.go.kr

 

오늘이 2021년 2월 21일 이니까, 

80년전 2월 어느 날,  대구의 한 작은 하숙집에서 고등학생 17명이 몰래 모여서 독립운동단체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다. 

할아버지가 평생 자랑스럽게 여기셨던 그 때의 이야기는 이젠 사료가 되어 

온라인상에서도 보훈처의 자료관에서 접할 수 있으니 후손된 입장에서는 참 감사한 마음이다. 

 

유흥수 할아버지는 사료의 내용만 봐서도

할아버지보다 더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앞장 서셨던 것 같다. 

일제에 검거된 이후, 대전지방법원에서 받은 형량(징역 5년형)도 할아버지의 형량보다 더 크고, 

광복 이후 훈장도 할아버지가 받으신 애국장보다 한 등급 위인 독립장을 받으셨다. 

그리고, 2016년 2월 할아버지 보다 2년 먼저 세상을 떠나셨다. 

 

 

2013년 7월.  나는 유흥수 할아버지를 찾아뵌 적이 있다. (당시 내 나이 28세)

정확하진 않지만 판교 쪽에 주거하셨던걸로 기억하는데 할아버지를 통해 연락처를 알아내서 그냥 방문 했었던 것 같다. 

할아버지의 막역지우를 한번 뵙고 싶어서였을까. 

당시에도 두 분 할아버지는 이미 고령이셔서 먼 거리를 이동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일제시대 산업화시대를 거쳐 스마트폰으로 세계가 연결된 글로벌 시대까지 살아오신 92세 노인이 

불쑥 찾아온 죽마고우의 손자를 만났을때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 

사실 나는 짐작도 가지 않는다. 다만, 시대를 떠나 친구의 자식(심지어 손자)이 본인을 찾아오는게 싫으실 이유는 없을거라는 생각은 있었다. 

정말 말 그대로 뵙고 싶어서, 할아버지 몸을 대신해서 간다는 마음으로 갔으니까 말이다. 

 

사실 그날 할아버지와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다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매우 반가워 하셨던 유흥수 할아버지의 표정과 90세 고령임에도 정정하셨던 모습.

그리고 중국집에서 배달음식을 시켜주셨던 것 정도가 기억에 남아 있다. 

 

92세 이셨음에도 정정하셨고, 거동은 편치 않으셨지만 정신도 맑으셨던 걸로 기억한다.

 

 

어느덧 8년이 흘렀다. 

이젠 유흥수 할아버지도 나의 할아버지도 다 하늘의 별이 되서 떠나셨다. 

그날의 나와 할아버지를 남기고 싶었나 보다. 이렇게 한장을 남겨둔걸 8년여가 지나서 발견했다.

 

독립운동을 떠나서 두분이 그립다. 

보훈처 홈페이지의 친절한 사료보다 두분의 목소리로 80년 전 그날의 이야기를 다시 듣고 싶다. 

십대 때 만나 기나긴 세월 동안 영혼의 친구셨던 두분. 

하늘나라에서 두 분 꼭 다시 꼭 만나십시오. 

 

그리고 이 곳에서 저는 저의 사랑하는 딸에게

증조 할아버지와 친구분들의 이야기를 두 분 대신 전해 주려 합니다. 두 분의 목소리로. 

 

419묘역에서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마주한 내 딸과 나 (2021.2.21)